[스크랩] 망한 회사도 살리는 5가지 리더십
특급 구원투수들의 ‘역전 카드’
때론 조폭두목이나 점령군처럼 … 직원에 대한 애정 표현은 강력히
'신(臣)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나이다. ’ 절망의 늪에서 이처럼 희망을 노래하는 장수가 몇이나 될까? 난세(難世)가 영웅을 만든다고들 하지만 정작 영웅을 만드는 것은 리더십이다.
잘나가는 회사를 죽이는 무능한 리더가 있는 반면 그렇게 죽어가는 회사를 다시 살려내는 유능한 리더도 있다. 한국의 경제 위기는 적지 않은 기업에 아픈 상처를 안겨 주었지만, 몇몇 리더들에게는 비장의 리더십을 보여 줄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런 ‘회생 리더십’의 실체는 무엇인가.
실패 원인을 정확하게 찾아라.
1999년 백갑종 사장이 쌍방울의 법정관리인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쌍방울의 경영을 맡게 됐으니 ‘쌍방울표’ 속옷을 입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 신제품 팬티 샘플을 몇 장 받아와 입었다. 그날 저녁 퇴근해 샤워를 하려고 옷을 갈아입는데 사각 팬티가 허리춤까지 둘둘 말려 올라와 있었다.
일전에 선물받은 외국 브랜드 팬티를 입었을 때와는 너무 달랐다. ‘아니, 쌍방울이 팬티도 하나 제대로 못 만드나?’ 하는 생각에 다음날 자신의 외국산 팬티를 들고 출근했다. 다자인팀장을 불러 팬티를 건네주며 “이것처럼 말려 올라가지 않는 팬티를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다.
백 사장은 팬티 한 장에서 쌍방울 회생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당시 모두가 쌍방울이 망한 이유를 무주리조트 등 무리한 사업확장 결과라고 여겼다.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패인은 대부분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자연 해소됐다.
백 사장은 보다 근본적인 패인이 주력 사업인 속옷 브랜드 자체에 있다고 판단했다. ‘속옷에도 패션이 있다’며 품질 개선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끌림’이라는 패션 언더웨어 브랜드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그 결과 쌍방울은 불과 1년반 만에 270억원대 적자에서 200억원대 흑자로 돌아섰다.
망한 회사를 다시 살리는 방법으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것이 구조조정이다. ‘자르고 줄이고 아끼고 통합하는’ 개혁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뼈를 깎는’ ‘피나는’ ‘눈물겨운’ 구조조정을 단행했다고 해서 모든 회사가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회생을 추진하는 리더는 기업의 근본적인 경쟁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LG카드 회생을 이끌어 낸 박해춘 사장도 그랬다. 박 사장은 LG카드의 패인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길거리 카드’라고 불릴 정도로 무분별한 발급을 한 것이 대량 부실을 가져왔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박 사장은 그 해결 방안을 찾는 데서는 남다른 판단을 했다. 무조건 발급량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화근인 ‘출혈 발급’은 신용불량 고객을 양산한 것만이 아니었다. ‘LG카드=아무나 가질 수 있는 카드’라는 이미지가 더 큰 문제였다. 박 사장은 그것을 불식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VIP급 고객들을 확보하고 관리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한다. 플래티넘 카드를 통해 카드의 품격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주력했다. 그것은 LG카드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효과가 컸다. 상승작용은 결국 ‘천만인의 카드’로 확대됐다. ‘너무 많은 사람이 쓰는 카드’라는 패인이 이제는 마케팅 전략이 된 것이다.
"당신들은 결코 패자가 아니다”
직원에게 재기의 자신감을 심어 주어라
망한 회사의 직원들은 대부분 주눅 들게 마련이다. 스스로 ‘패잔병’이라는 자격지심으로 하루하루 회사를 다니는 것초자 힘들어 한다.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직원들은 더 나은 조건의 다른 회사로 떠날 생각을 하게 마련이고 실제로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 기간 중에 유능한 인재들이 이탈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이런 기업의 회생을 추진하는 리더는 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 직원들에게 “당신들은 패자가 아니다”는 확신을 심어 주고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북돋워 주어야 한다.
대우건설이 워크아웃을 졸업하던 2003년 말 CEO가 된 박세흠 대우건설 사장. 임원 시절 그는 대우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회사를 떠나야만 했던 500여 명의 직원들을 보며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사장이 된 후 그는 직원들부터 챙겼다.
건설현장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맺어진 끈끈한 동료애를 바탕으로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런 의리를 보여 준 것이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고 남은 이유가 됐다.
한국의 벤처 신화를 이룩했다가 몰락한 메디슨을 보면 직원들의 사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파산 직전의 메디슨이 3년 만에 다시 부활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직원들의 자신감과 애사심의 힘이 컸다.
부도 직후 당시 메디슨을 방문한 인사들은 하나같이 “어떻게 망한 회사의 직원들이 그렇게 자신만만해 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고 말하곤 했다. 메디슨의 공동대표들은 직원들이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계속해 연구개발과 마케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강력한 구조조정을 하면서도 해고는 없었고 월급이 깎이지도 았았다. 심지어 부도 전보다 인력은 더 늘었다.
박해춘 사장도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쓴 CEO다. LG카드 사태로 우리사주가 휴지 조각이 되면서 LG카드 직원 대부분은 손해가 막심했다. 그들 중에는 빚을 얻어 주식을 산 이들도 많아 곤란에 빠지기도 했다. 박 사장은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록한 지난해 보상 차원의 특별 보너스를 지급했다. 채권단 대표인 산업은행의 반대를 무릅쓴 강행이었다. 그 때문에 박 사장의 연봉은 채권단에 의해 동결당하기까지 했다.
지난 3월 퇴임한 이지송 전 현대건설 사장도 재임 중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며 직원 사기를 높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작업복 차림으로 직원들과 어울리며 과거 승승장구했던 ‘현대건설맨’의 자존심을 상기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살아난 자긍심으로 전직원이 재건에 나서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난 점령군이 아니다. 함께 얘기하자”
모든 의사결정은 아래로부터
망한 회사의 직원들은 새로 부임하는 사장에 대한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마치 점령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게다가 개혁을 한다며 안 그래도 만신창이가 된 조직을 뒤흔들어 놓을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하이닉스반도체의 화려한 부활을 주도한 우의제 사장은 부임 후에도 언제나 혼자 다녔다. 비서가 있기는 하지만 주로 내근하도록 하고 수행비서도 없이 현장을 누비는 것이 우 사장의 스타일이다. 공장을 방문할 때면 작업장을 둘러본 후 식당으로 가는 것이 그의 기본 코스다. 그리고 주걱과 국자를 들고 직접 배식을 한다. 직원들에게 격려와 애정을 ‘퍼주기’ 위해서다.
우 사장은 사장 부임 전 하이닉스반도체의 사외이사를 맡기는 했지만 그는 외환은행에서 수십 년을 보낸 금융맨이다. 하이닉스반도체의 회생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몇 차례나 거절을 한 것도 반도체 사업분야에 자신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반도체 전문 경영자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냈다. 전문성이 아니라 감성 리더십이 회생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는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섞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회의를 진행할 때도 직접 노트북을 들고 와 선을 연결하고 끝나면 주섬주섬 챙겨 갔다.
현대전자 시절 현대의 권위주의적 경영방식에 익숙해 있는 직원들에게 그런 CEO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사장에 대한 친근함은 직원들에게 큰 힘이 됐다. 직원들과 터놓고 대화하다 보니 반도체에 대한 전문성도 따라서 갖추게 됐다. 감성경영이 지식경영으로 이어진 셈이다.
백갑종 사장도 직원들에게 소탈했다. 백 사장은 쌍방울에 첫 출근하는 날 임원들에게 자신이 절대로 법원에서 보낸 점령군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내 사람을 절대 데려오지 않겠다”는 얘기도 했다.
박세흠 사장은 28년을 대우건설에서 일한 만큼 회사 사정과 임직원들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사내에서 그 분야를 가장 잘 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찾아 상의했다.
어떤 결정도 독단적으로 내리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박 사장은 1년에 몇 차례씩 호프데이를 열어 직원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곤 했다. 박 사장은 직원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그 기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장을 활짝 열어두었다. 대우건설 인수의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박삼구 회장도 “대우건설의 직원을 산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한때 세계경영의 중심축이었던 대우인터내셔널을 회생시킨 이태용 사장도 직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주말마다 직원들과 북한산에 오르는 부지런한 행보를 지속했다.
이지송 사장은 공사수주 때마다 직원들에게 떡을 돌리고 시무식 등 주요 행사 때마다 직원들에게 떡을 나눠주면서 사기를 높이는 덕에 ‘시루떡 사장’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대우자동차 회생의 주역인 닉 라일리 전 GM대우 사장은 화합과 상생의 새로운 노사문화를 정착시킨 CEO로 평가받는다. 그런 노사간 협력 덕분에 대우 인천차를 조기 통합할 수 있었다. 지난 3년반 동안 노사분규 없이 조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노조와 원만한 관계를 이뤘기 때문이다. 정리해고자를 모두 복직하겠다는 직원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 회사를 떠난 아름다운 리더로 기억되고 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욕 먹더라도 때로는 ‘무섭게’
우의제 사장은 하이닉스의 워크아웃 조기 졸업이 결정된 날에도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았다. 대신 “들뜨거나 자만하지 말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모든 직원에게 돌렸다. 정상에 서 있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이라며 자기 만족은 실패를 낳고 지금의 껍질을 벗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그의 얘기였다. 직원들에게 그토록 자상하게 의욕을 북돋워준 그였지만 정작 성공의 문턱에 도달했을 때는 오히려 의연함을 보이고 직원들을 단속한 것이다.
박해춘 사장은 망한 회사의 CEO는 조폭 두목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의 ‘조폭 경영론’의 핵심은 회생 기간 내내 조직을 긴장시켰다. 직원들을 절대로 느슨하게 풀어 주는 법이 없다. 회사 전체의 이익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노조와도 타협이란 없었다.
취임 직후 노조 간부들을 만나 “나와 한 덩어리가 돼 회사를 살릴 것인지 죽일 것인지 지금 이야기해달라”며 “안 하겠다면 나는 지금 그만두겠다”고 정면돌파를 강행했다. 그 결과 노조로부터 무분규와 조기 출근 협조를 모두 얻어낼 수 있었다. 박 사장은 모든 결정을 속전속결로 진행했다. 파산 위기가 어디서 왔는지 그 실체를 빨리 파악해 타개 전략을 세우려면 지체할 틈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박종원 코리안리재보험 사장도 회생을 위해서라면 무서운 CEO가 돼야 한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98년 파산으로 치닫던 코리안리재보험(당시 대한재보험) 대표 자리를 떠맡은 후 조직을 완전히 바꾸는 혁신을 단행했다. 그 결과 아시아 1위의 초우량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해병대 출신이어서인지 그의 경영 스타일은 ‘독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
1963년 정부투자기관인 대한손해재보험공사로 시작된 코리안리는 78년 민영으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독점적인 사업권을 누리면서 위기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유약해졌다. 이런 조직문화에 근성을 키워주기 위해 박 사장은 취임 후 직원들을 이끌고 등반을 시작했다. 취임하자마자 전체 인원 320여 명 중 3분의 1을 정리했다.
퇴출 대상에 전직 노조위원장까지 오르자 노조와의 갈등을 우려한 임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정치권으로부터의 압력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 명이라도 예외를 두면 원칙이 무너진다는 이유로 전직 노조위원장을 포함한 대상자 전원을 예외없이 정리했다. 전 과정을 투명하게 처리해 누구도 반론을 재기하지 못했다.
지금도 주 1회씩 열리는 간부회의에 노조대표가 참석한다. 63년 설립 이후 97년까지 35년 동안의 누적 당기순이익이 827억원에 불과하던 코리안리재보험은 그의 취임기간인 1998∼2005년 불과 8년 동안 3700억원의 누적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돌격하라”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
지휘하지 말고 직접 나서라
망한 회사를 되살리려면 잘나갈 때보다 몇 배는 힘이 든다. 직원들도 지치게 마련이다. 그런 직원들에게 무조건 나가서 싸우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리더가 앞장서야 한다. 리더의 솔선수범은 백 마디의 지시보다 직원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태용 사장은 채권단을 일일이 찾아가 “대우의 해외 네트워크를 살려달라”며 설득하고 다녔다. 이지송 전 사장도 회사회생을 위해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수주를 위해 중동으로 발품을 팔며 돌아다녔다. 사장 취임 직후에는 미국에서 이라크 미수금을 받아내기 위해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지난 3월 퇴임하기 며칠 전까지도 두바이에서 직접 공사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는 등 열정적으로 회사일에 매진했다.
’ 하는 생각에 다음날 자신의 외국산 팬티를 들고 출근했다. 다자인팀장을 불러 팬티를 건네주며 “이것처럼 말려...‘속옷에도 패션이 있다’며 품질 개선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끌림’이라는 패션 언더웨어 브랜드는 그렇게....